영화를 보는 기쁨 중 하나로 ‘읽기의 쾌락’을 들 수 있다. 작품의 시청각적 요소를 치밀하게 읽어 내고, 때로는 관련 잡지나 신문 등의 영화감독이나 영화스타에 관한 기술을 특정 맥락의 분석에 응용함으로써 다양한 작품 해석을 유도할 수 있다. 또한 영화화된 소설이나 희곡이 누구에 의해 쓰였고, 어떤 독자에 의해 어떤 맥락으로 수용되었는지를 알아봄으로써 작품 이해를 높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 작품 내외의 요소를 결합해 젠더/섹슈얼리티/에로스의 시점에서 영화를 다시 읽을 때, 직접적으로 성소수자의 등장인물이나 동성애적 욕망을 표현하지 않은 작품일지라도 풍부하고 다양한 읽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
본 전시의 제1장은 개봉 당시의 영화비평이나 선행연구를 참조하여 패전을 맞은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일반 상업영화에서 어떠한 젠더/섹슈얼리티/에로스의 표현이 불/가능했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전후 일본영화’의 틀안에 1970년대를 포함하는 것은 조금 범위가 넓다는 인상을 줄지 모르지만, 성전환 수술을 받은 카루세루 마키(カルーセル麻紀)가 트랜스 여성으로 영화 『나는 시골의 프레슬리(俺は田舎のプレスリー)』에 등장한 1970년대 말까지의 작품을 다룬다.
패전 직후부터 점령군의 검열을 받던 일본 영화산업은 1949년 「영화윤리규정」을 제정하고, 후에 구영륜(旧映倫)으로 불리는 「영화윤리규정관리위원회」를 업계 내부에 발족시켰다. 1956년 말에는 제삼자가 운영하는 자율규제기관으로 「영륜관리위원회」가 탄생했다. 구영륜 시대부터 「성 및 풍속」 조항에는 「색정도착 또는 변태성욕」에 관한 기술이 있었고, 이는 「동성애, 게이 보이의 생태」 묘사 규제를 목적으로 했다. 이런 자율 규제 속에서 감독이나 배우는 어떻게 젠더/섹슈얼리티/에로스의 다양한 표현 방법을 모색했을까. 구체적으로는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 영화의 재고,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 감독의 「노리코 3부작(紀子三部作)」, 하세가와 가즈오(長谷川一夫)의 『유키노죠헨게(雪之丞変化)』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하나가사와카슈(花笠若衆)』에서 보이는 성 표현, 토우에이(東映) 영화사의 협객 영화에서 보이는 남성 간의 친밀함,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에서 레즈비언적 욕망의 표상 등, 비평가와 팬들이 축적해 온 ‘읽기의 쾌락’의 방법을 축으로 전후부터 1970년대까지의 일본 영화를 다시 읽고자 한다.
일본 영화산업을 성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닛카츠(日活) 로망포르노나 장미족 영화로 대표되는 성인영화가 묘사한 성의 형상을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근 성인영화에 대한 관심이 영화(산업사) 연구분야에서 높아지고 있어 작품 분석뿐만 아니라 제작 관련자 인터뷰, 홍보용 문서, 제작 자료와 같은 필름이 아닌 자료 분석도 진행되고 있다.
성인영화를 대상으로 한 일본 영화사 재구축 시도는 연극박물관에서도 두가지 방향에서 실천되어 왔다. 첫째로, 연극영상학제휴연구거점(이하, 연구거점)에서 2018년부터 2년간에 걸쳐 공동연구팀(연구과제「전후 일본영화의 촬영소 시스템 변천과 그 실태」)이 연극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닛카츠 로망포르노의 선전자료를 조사・연구해 왔다. 사양기로 접어든 1960년대 초 이후의 일본 영화산업에서 1971년부터 1988년에 걸쳐 닛카츠 영화사에서 제작한 닛카츠 로망포르노는 생존전략의 하나였다. 성인영화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해 온 측면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산업사적 관점에서 검증되어야 하지만, 본 전시에서는 닛카츠 로망포르노에서 여성의 성이 어떻게 표현되며, 또한 출연자가 아닌 제작에 관여한 여성들의 존재를 거점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둘째로, 1980년대 초반 남성 동성애자를 주요 타깃으로 탄생한 장미족 영화에 역사적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성애 남성을 대상으로 한 닛카츠 로망포르노나 기타 성인영화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지적처럼 장미족 영화도 동성애자를 성적인 판타지로 상품화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이런 비판의 타당성은 부정되어서는 안 되나, 비판이 장미족 영화의 동성애 표상을 경시함으로써 보이지 않게 하는 것,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연극박물관에서는 이성애자 대상의 성인영화뿐만이 아니라, 장미족 영화도 다수 제작한 고바야시 사토루(小林悟) 감독의 소장 자료를 2018년도부터 조사하고 있다. 동성애 차별이 현저했던 1980-90년대 일본에서 장미족 영화는 가족을 갖고 싶어 하는 젊은 동성애자의 모습, 세대 간 교류, HIV/AIDS 등을 그려내며 일반 상업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성애자의 욕망과 갈등 등을 관객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장르였다. 본 전시에서는 조사 결과의 공개로서 고바야시 사토루(小林悟) 소장 자료 일부를 소개한다.
1980년대 일본 영화산업은 대형 영화사의 촬영소에서 제작하는 조직적인 영화 생산 시스템의 종식을 맞이했다. 포스트 촬영소 시대의 일본 영화산업은 제작자, 관객/소비자, 미디어의 융합 등 여러 면에서 변화를 겪었고 1989년 거품경제 붕괴 이후 1997년 기타노 다케시(北野武), 가와세 나오미(河瀬直美),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 작품의 세계적 성공으로 재흥의 빛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려운 상황이 이어져 2000년대 이후에도 제작・배급・흥행의 형태에는 변혁이 요구되고 있다.
영화 산업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아우르며 영화와 TV드라마는 성소수자나 동성 간의 친밀한 관계성을 어떻게 표상했을까. 1980년대 초반에는 장미족 영화가 성인 영화 전문 상영관에 등장했고(제2장),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주로 해외 퀴어영화를 배급한 미니 시어터 문화의 융성과 퀴어 LGBT 영화제의 탄생 및 발전이 있었다(제4장). 성인영화와 해외 작품을 통한 성소수자의 표상만 일본의 영화문화 공간에서 수용된 것은 아니다. 포스트 촬영소 시대의 새로운 독립영화 작가들은 소녀 간의 친밀함이나 동성애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본 전시에서는 1980년대에 피아필름페스티벌(PFF)에서 발굴한 영화작가 가자마 시오리(風間志織)와 하시구치 료스케(橋口亮輔)를 소개한다. 때로 과격한 소녀 표상을 특기로 하는 가자마(風間)의 작품에는 게이 남성이나 레즈비언적 욕망을 자극하는 관계성이 그려진다. 한편, 1993년 『스무 살의 미열(二十才の微熱)』을 발표한 하시구치(橋口)는 동시대의 오오키 히로유키(大木裕之)와 함께 성소수자임을 밝힌 몇 안 되는 오픈리(Openly) 게이로 경력을 시작한 영화작가다.
1990년대 영화에서 동성애를 다룬 작가는 가자마(風間)와 하시구치(橋口)뿐만이 아니다. 1980년대의 에이즈 패닉이나 1990년 2월의 「후추(府中) 청년의 집 사건(동성애자 인권 단체가 후추 청년의 집에서 합숙 중에 다른 이용객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도쿄도가 동성애자 이용을 거부한 사건) 」이 일본의 동성애 차별을 가시화하는 한편, 여성잡지 『CREA』 1991년 2월호의 ‘게이 르네상스 91’ 특집이 계기가 되어 1991년부터 1995년까지 ‘게이 붐’이 일었다. 현재는 ‘동성애의 상품화’로도 비판을 받지만, 동성애나 HIV/AIDS를 다룬 이야기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TV드라마가 차례로 제작된 시기다. ‘게이 붐’은 동성애나 동성 간의 친밀함을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서 가시화하는 동시에 어떠한 존재를 보이지 않게 해 버린 것일까.
1992년 영화비평가인 B. 루비 리치(B. Ruby Rich)는 “긍정적이고 올바른 LGBT의 이미지, 스토리, 캐릭터에 저항하며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욕망을 철저히 긍정하는 영화적 실천”을 ‘뉴 퀴어시네마(New Queer Cinema)’로 정의했다(칸노(菅野) 2015 : 204).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탄생한 뉴 퀴어시네마라는 새로운 물결의 시작은 기존의 레즈비언 게이 영화와는 다른 (때로 과잉된) 스타일로 성소수자의 이야기와 욕망을 그린 영화들이 토론토 페스티벌 오브 페스티벌즈(1991), 선댄스 영화제(1991), 뉴디렉터/뉴필름 영화제(1992)와 같은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이 계기였다. 영화제는 퀴어 영상문화 표현자와 관객에게 있어 표현, 시장의 획득, 커뮤니티 형성 등의 공간으로 매우 뜻깊은 역할을 하고 있다.
뉴 퀴어시네마를 일으킨 영화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제작된 퀴어영화를 일본에 수입하여 수용의 기회를 확대한 것이 1990년대 일본 수도권의 다양하고 성숙한 영화문화였다. 거품 경제 시대의 기업이 문화 예술을 지원하는 ‘메세나형 소비예술 문화'에 힘입은 미니 시어터의 융성은 거품 경제 붕괴 후에도 실험적이고 마이너한 영화 작품의 배급과 상영을 가능하게 했으며, 거기서 확대된 영화 문화 공간 속에 퀴어영화가 포함되어 있었다(칸노(菅野) 2015 : 203-205). 1990년대 서브컬처 잡지에서도 특집으로 다룬 퀴어영화는 젊은 여성 관객에 의해 널리 수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퀴어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비평가 중 한 명인 이시하라 이쿠코(石原郁子)는 당시의 수용 체험을 선명하게 되살리는 영화 비평을 다수 남기고 있다.
1990년대는 일본의 영화제 문화에도 하나의 전환기를 맞은 시기이다. 1992년 3월 6일~8일, 제1회 도쿄 국제 레즈비언 게이 필름 & 비디오 페스티벌이 나카노(中野) 썬플라자 6층 연수실에서 개최되어, 3일간 약 1,000명의 관객 동원 수를 기록했다. 이후 키치죠지(吉祥寺) 바우스 시어터, 아오야마(青山) 스파이럴 홀 등의 회장에서 현재까지 매년 개최되고 있다. 2000년 이후 퀴어와 LGBT를 주제로 하는 영화제가 일본 각지에서 속속 생겨났으며, 섹슈얼리티에 따른 당사자성을 존중하면서 지역 커뮤니티에서도 동시에 개최되고 있다. 본 전시에서는 연극박물관 소장의 영화 팸플릿과 「NPO법인 레인보우 릴 도쿄(Rainbow Reel Tokyo)」의 협력으로 프로그램 자료를 소개한다.
【인용문헌】
칸노 유우카(菅野優香)「퀴어・LGBT영화제 시론-영화문화와 퀴어의 계보」『현대사상』 2015년 10월호, pp. 202-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