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20년대 자유 민권 운동에서 등장한 정치 청년이 계몽을 위해 ‘개량연극’을 시작한 것이 신흥연극의 기원이다. 소시시바이, 쇼세시바이(書生芝居), 신연극, 정극(正劇) 등으로 호칭을 바꾸면서 점차 ‘신파’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어 간다.
초창기의 신연극은 가부키의 영향을 짙게 받으면서도 기존의 가치관에 도전하는 수많은 신기한 시도로 새 시대의 전위를 달리고 있었다.
첫 번째로 손꼽히는 것이 가와카미 오토지로일 것이다. 가와카미는 당시 생소했던 전화기와 전기조명을 무대에서 사용하거나 기차를 대도구로 선보이는 등 기발한 아이디어로 화제를 모았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현지를 시찰해 일종의 르포르타주라고도 할 수 있는 청일 전쟁극을 잇달아 상연함으로써, 신연극이 메이지 시대의 현대극임을 보여주며 극단 한복판에 우뚝 섰다. 이후 가와카미는 혁신적인 흥행 방법으로 메이지라는 시간을 앞질러 나간다.
물론 신연극・신파에서 아방가르드적인 것을 가와카미만으로는 논할 수 없다. 메이지 30년대에는 전국에 5천 명 이상 있었다는 신(新) 배우가 각자 연구를 거듭하며 새롭고 신기한 무대를 전개하고 있었다.
또한, 메이지 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야마모토 호우스이(山本芳翠)나 아사이 추(浅井忠)와 같은 서양화가가 무대 장치를 다루게 된다. 그 선구자적 존재가 구로다 세이키(黒田清輝) 문하의 다마키 데루노부(玉置照信)다. 본 전시에서 소개하는 신파 무대그림은 그 자체로 당시를 상상하게 하는 회화 작품이기도 하다. 화공 오치아이 요시마로(落合芳麿)의 붓에 의한 신감각의 반즈케(番付: 공연 팸플릿)가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신파의 전사(前史)와 같은 소시시바이 시대를 단서로 신연극이 다양화하는 과정을 되짚어, 러일 전쟁부터 메이지 말년까지의 신파 황금기를 개관한다.